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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화가 조도중

이번 조도중 개인전을 처음 대하는 미술애호가들은 조도중이 서양화가라는 사실을 의아하게 여길 것 같다. 작품에서 쓰여진 화구가 우리의 눈에 익은 유화구가 아니요, 그 주제도 서양화의 그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도중의 화구는 그가 고심하며 찾아낸 여러 색의 흙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것이요. 그의 주제 역시 대지와 관련이 깊다.

우리의 속담에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농부가 뿌린 씨와 한 치 틀림이 없는 소출이 땅에서 나온다.

조도중이 ‘흙’을 거의 미칠만큼 사랑하게 된 것도 이 흙의 원시적인 정직성 때문이었겠지만, 흙에는 또 하나의 미덕이 있으니 곧 참을성이다.

그것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을 기다린다.

(중략)

우리는 조도중의 약 20년 전 작품스타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세련된 도시적 감성에 지배되어 있었고, 파울 클레 식의 기지가 번득이곤 했었다.

그의 작품을 본 사람은 거개가 그와 같은 스타일이 계속되고 발전되리라고 믿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20년 후의 조도중은 전날의 그 스타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흙’으로 돌아가 있었으니, 놀라운 변신이 아닐 수 없다.




조도중의 대표작의 하나일 ‘숲’을 검토해보자.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분위기로 가득찬 이 작품에서 나무 줄기와 꽃들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그 형상이 추상화되어 있다.

우리는 추상과 추상화에서 인위적인 것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숲’에서의 그 추상화는 기묘하게도 인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역설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숲’자체가 전부 흙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화구 자체도 흙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숲의 나무 줄기들이 영락없이 흙을 닮고 있는 점이다.

그 결과 숲의 나무들은 흙의 나무들이 된 것과 같으며, 바로 그 점에서 숲나무들이 다름아닌 대지적인 ‘생명의 나무들’임이었음이 밝혀지게 된다.

이것은 ‘나무’라는 작품에서도 같다.



눈을 돌려 ‘인동초’를 보자. 그것은 제목이 암시하듯이 갈등과 고난의 겨울을 겪어야하는 수난자의 상징이다. 화면에서 밝은 색의 나무 줄기와 꽃들이 검은 색의 그것들과 얽혀 있는 형상도 그 점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 개의 꽃을 포용한 화면 중앙의 ‘사랑’의 둥근 원에 의하여 그 고난의 극복의지가 동시에 암시되어 있디고 하다.

그 구도는 단순,소박하면서도 모든 갈등을 화해시키는 그 ‘사랑’의 원에는 뭔가 마술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다.

...

(중략)


2003년

이보영(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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